만약 너희가 나를 이 짙은 무지의 동참자로 만들고 싶다면, 그 생각은 접어라!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통이다. 그것은 참된 생명(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을 향해 나아가는 필수적인 한 걸음이다. 영혼은 단지 새로운 거처로 옮겨 갈 뿐이며, 죽음은 외투를 갈아입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잠쉐드는 이 차원에서 그 옷을 입고 삶을 겪은 뒤, 이제 그것을 갈아입은 것이다. 이는 배우가 여러 극에서 다른 배역을 맡거나, 같은 연극에서도 막 뒤에서 의상을 바꿔 다른 차림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는 것과 같다. 혹은 잠에 비유할 수도 있다. 죽음과 잠의 차이는, 전자 뒤에는 새로운 몸에서 깨어나고 후자에서는 같은 몸을 다시 자각한다는 점이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밤에 누군가가 잠들 때는 히스테리를 일으키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다음 아침 그가 다시 살아 깨어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조만간 새 몸에서 다시 살아 깨어날 것이 분명한데, 왜 죽음의 잠에 대해서는 같은 담담함을 보이지 못하느냐?
너희는 때때로 기차를 타고 여행하고, 다른 승객들은 아무 근심 없이 로나블라, 칼리안, 다다르 같은 각자의 역에서 표에 따라 내린다. 잠쉐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행 중이었고, 표에 적힌 목적지에 이르자 기차에서 내린 것[몸을 떠난 것]이다. 그의 역은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너희는 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한다. 기차는 밤낮없이 달리고 무수한 승객들이 표에 따라 각기 다른 역에서 내린다. 그 모든 사람을 다 붙잡고 얼마나 울 셈이냐?
대부분이 담담하지 못한 까닭은, 결함 있는 필멸의 눈으로는 소위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사랑하는 이의 미세한 형체를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영적 존재를 알지 못한다. 결국 사람들을 울고 통곡하게 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라기보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어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는 이기심이다. 사람이 죽으면 사방에서 곡성이 터진다. "사랑하는 아버지(어머니)가 죽었어!... 내 삶의 근원이 사라졌어... 내 눈의 빛이 꺼졌어!... 내 사랑은 어디 있나?... 내 버팀목이 사라졌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