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르는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고독을 침범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 뜻을 분명히 알렸다.
님 나무 아래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사이는 이 가난한 마을에서 모스크 역할을 하던 작은 양철 헛간으로 거처를 옮겼다. 사이는 그 모스크를 드와르카마이(Dwarkamai, 자비의 어머니) 마스지드(Masjid, 모스크[이슬람 사원]의 아랍어 원어)라고 이름 지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이 그를 충실히 섬기기 시작했으니, 그를 '사이'라 부르며 맞이했던 힌두 사제 말살파티와 타티아 코테 파틸이라는 사람이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그들을 비꼬아 "마스지드의 삼인조"라고 불렀다. 훗날(1909년) 큰 폭우에 마스지드가 새기 시작하자, 사이 바바는 근처의 흙벽으로 된 마을 차바디(chavadi, 마을 사무실로 쓰이는 작은 두 칸짜리 건물)로 모셔졌다. 그때부터 그는 마스지드와 차바디에서 하루 걸러 번갈아 잠을 자기 시작했다.1
그 당시 쉬르디는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사이가 그곳에 정착한 지 몇 해 뒤 전염병이 그 지역을 휩쓸어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방 관리들이 전염병을 가라앉히려 온갖 수를 써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몇몇 사람이 사이를 찾아와 자신들의 비참한 사정을 이야기하며, 쉬르디 주민 전체가 전멸하기 전에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파키르는 그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여 근처 집으로 가서 맷돌을 집어 들고 드와르카마이 마스지드로 돌아와 밀을 갈기 시작했다. 밀가루를 모아 한 여인에게 주며 마을 경계를 따라 뿌리라고 지시했다. 여인이 시킨 대로 하자 머지않아 전염병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모두가 안도했다. 환자들은 회복되었고 쉬르디는 역병의 치명적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주변 마을의 허약한 사람들과 병든 이들이 사이를 찾아왔고, 그는 약초로 그들을 치료했다. 그 뒤에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앉아 그들이 부르는 신심 어린 노래를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의 눈 속 빛에 이끌렸다! 이 완전한 분의 눈은 너무나 빛났고, 그 시선에는 강렬한 힘과 깊이 꿰뚫는 통찰이 있어 아무도 오래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속속들이 읽고 있으며, 그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고 느꼈다. 그의 얼굴을 본 뒤 사람들은 오로지 경배하며 절하고, 자신의 삶을 그의 발 앞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헌신자 가운데 한 사람인 G. S. 카파르데는 저명한 변호사이자 인도 자유 투사 로크마니야 틸락의 동료였다.
각주
- 1.얼마 뒤 마스지드(Masjid)는 다시 지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