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니는 너무 게을러서, 아침에 다시 입는 수고를 덜려고 때로는 옷은 물론 신발까지 신은 채 잠들곤 했다. 바바는 그를 깨우려고 직접 그의 방에 가서 문을 두드리곤 했다.
1927년, 침묵을 시작한 지 몇 해 뒤 바바는 글쓰기를 중단했다. 그러나 그는 우편물과, 가끔은 신문도, 계속 직접 읽고 있었다. 하지만 1948년 11월 말 머스트 여행에서 돌아온 뒤 바바는 어떤 것도 읽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그가 어떤 편지나 전보, 메모를 확인하고 싶을 때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읽어 주어야 했다.
1948년 12월에는 바바를 만나기 위해 여러 방문객이 메헤라자드로 왔다. 그들 가운데에는 다시 온 다울랏 싱과 그의 아들 우프카르, 카르멘 마시의 아들 호미, 잘 루시, 키샨 싱이 있었다. 파파 제사왈라는 12월 4일 메헤라자드에 심을 과일나무들을 가지고 왔다.
바바는 그에게 "바이라만갈라 땅을 처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큰 봉사가 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파파는 이전에도 이 일을 부탁받았지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 바바 명의의 위임장이 작성되어 파파에게 주어졌다.1
핌팔가온에서는 고락나트라는 성인의 이름을 딴 남자아이를 낳은 한 마을 여인이 죽었다. 바바는 그 아이를 메헤라자드로 데려오게 하고, 고허에게 그 아기를 돌보라고 지시했다. 열흘이나 열이틀 뒤, 바바는 아기를 메헤라바드로 보내며 코르셰드가 그를 키우도록 지시했다. 닐루 박사는 그 유아의 전담 소아과 의사가 되었고, 고락나트는 왕자처럼 자라났다. 그를 위한 통조림 우유는 봄베이의 메헤르지에게 특별 주문했고, 값비싼 옷과 다른 물품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바는 가끔 메헤라바드를 방문할 때마다 고락나트를 보았고, 아이가 조금이라도 감기에 걸리거나 아프면 닐루와 코르셰드는 바바의 엄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이 무렵 바바는 고허에게 메헤라자드의 작은 연못에서 오리를 기르고 번식시키라고 했다. 고허는 양의학 의사였고 아기를 돌보는 법은 알았지만, 오리들의 양어미 노릇을 하는 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도 그녀는 참고서를 찾아보며 그 일에 밝아졌고, 최신 동물 사육법을 써서 자기 임무를 수행했다.
한 번은 시장 심부름꾼이 날마다 하는 장보기를 나가려 할 때, 고허는 자기가 돌보는 오리들에게 줄 사료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주
- 1.파파는 1949년 2월 이 부동산을 23,673.14루피에 매각하는 데 성공했다. 전체 토지 가운데 벤코바 라오는 기초석을 놓은 자리와 몇 채의 단칸 건물이 포함된 작은 일부를 살 만큼의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