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2월 9일, 정치인 S. 라다크리슈난 박사가 바바를 만나러 왔는데, 일행으로 67세의 V. 수브라흐만야 아이어(마이소르 대학교 전 부총장이자 철학 교수)와 같은 대학의 와디아 교수가 함께했다.1 라다크리슈난은 나그푸르의 데슈무크 박사를 통해 바바를 알게 되었고, 바바의 이웃 중 한 사람이었던 아이어를 통해 이 지역에 바바가 머문다는 사실을 알았다. 칼레마마는 메헤르 바바가 현재 은둔 중이라 6월에 은둔이 끝날 때까지는 면담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알렸다. 그들은 떠났다.
라다크리슈난은 바바에게 관심이 있었고 훗날 『God Speaks』 한 부도 받았지만, 바바의 다르샨을 위해 다시 오지는 않았다. 그가 1960년대 인도 대통령이 된 뒤에는 델리의 바바 러버 모나와 마노하르 사카레에게서 바바 소식을 듣곤 했다. 그들은 라다크리슈난에게 바바의 활동을 전해 주고, 레코드 플레이어로 바바의 아르띠를 들려주곤 했다.
마이소르에서 바바는 2월 14일 아침 남성 만달리의 방갈로를 방문했다.
몇 가지 일을 논의한 뒤 대화는 사랑의 측면으로 옮겨 갔고, 바바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행복도 주고 고통도 줍니다. 포도주 잔이 피의 잔으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부아사헤브가 구스타지를 사랑해서, 그 사랑의 바깥 표현으로 구스타지의 등에 올라타고 뺨을 꼬집고 콧수염을 잡아당긴다고 해봅시다. 그것은 사랑이고 장난스러운 놀이입니다. 부아사헤브에게는 즐거움이지만, 불쌍한 구스타지에게는 큰 고통과 괴로움이지요."
이 대화 뒤 그날 저녁 바바는 남자들과 차문디 언덕으로 나들이를 갔고, 다음 날 저녁에는 여자들과 다시 갔다. 차문디 언덕에는 힌두 사원이 있었다. 바바는 칼레마마를 안으로 보내 여신의 다르샨을 받게 했다.
마이소르로 옮기기 전 바바는 자신이 은둔 중일 것이므로 만달리가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라 메헤라바드, 아흐메드나가르, 나식, 마이소르 어느 곳에서도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다. 바바는 조로아스터력으로 자신의 42번째 생일이던 1936년 2월 16일 일요일에 방갈로르를 방문했다. 그는 이미 아이양가르 가족에게 생일 축하는 하지 말고, 이번 방문은 가족을 보기 위한 것뿐이라고 알려 두었다. 바바는 그날 알파벳 판 사용까지 중단하고 손짓과 몸짓으로만 의사를 전했다.
그날 아침 8시 15분 차로 마이소르를 떠나 3시간 뒤 방갈로르에 도착했다. 아이양가르 가족은 바바를 정중히 맞았지만, 그의 뜻에 따라 아르띠나 예배 의식은 거행하지 않았다.
각주
- 1.수브라흐만야 아이어는 신지학자였으며 마이소르의 마하라자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였다. 아이어는 후에 폴 브런턴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마이소르의 마하라자는 브런턴에게도 환대를 베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