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드구루들이 보기에도 끔찍한 상처와 훼손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너희는 개미나 각다귀, 모기를 죽일 때 무엇을 느끼느냐? 전혀 없다! 푸주한이 닭의 목을 거칠게 비틀어 죽일 때는 마음이 아프냐?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 살인의 상처와 피, 고통 앞에서만 왜 떨고 두려워하느냐? 개미, 파리, 닭, 염소도 인간처럼 생명이 있다. 왜 한쪽엔 마음을 두고 다른 쪽엔 두지 않느냐?
너희가 인간에 비해 동물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듯, 사드구루도 인간의 죽음을 사소한 것으로 본다. 그들에게 온 세상은 작은 점 하나와 같다. 그렇다면 사람 하나의 죽음을 왜 걱정하느냐? 게다가 사드구루에게 육신을 내려놓는 일은 죽음이 아니다. 그저 한 형태를 벗고 다른 형태를 입는 것일 뿐이다. 몸은 영혼을 덮는 외투다. 그런 몸이 매일 수십만씩 떨어지고, 같은 수가 동시에 다시 몸을 입는다. 사드구루는 환상에 대해 이미 죽었기에, 참으로 영원 속에 산다. 그러니 인간의 몸을 벗고 외투를 갈아입는 일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어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몸은 천 번 죽어도 아트마[영혼]는 살아 있다. 그것은 결코 죽지 않는다. 실현의 상태에서 몸과 마음이 함께 죽어도 아트마는 영원히 살아 있다.
몸은 마음을 위해 살고 일하고 고통받으며, 마음은 영혼을 위해 산다. 예를 들어 천을 몸, 몸을 마음, 마음을 영혼으로 놓고 보라. 이제 젊고 단정한 옷차림의 처녀가 네 앞에 선다고 해보자. 옷이 몸을 잘 가리고 있을 때는 마음이 특별히 반응하지 않아 억제된다. 그런데 바람에 옷자락이 살짝 들려 잠깐 다리가 드러나면, 즉시 마음이 영향을 받아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이 치솟기 시작한다. 그것을 일으킨 것이 무엇인가? 천, 즉 몸이다. 천이 몸에 그러하듯 몸도 마음에 그러하다. 곧 천이 몸에 영향을 주듯 몸도 마음에 영향을 준다.
7월 21일과 22일은 힌두교 축제일이었다. 이 성일을 기념해 바바는 아랑가온 사원에 있는 성자 부아지 부아의 사당까지 행렬로 모셔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