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가 페르시아어로 질문하자 일행 중 한 사람이 페르시아어로 이렇게 답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희는 페르시아어를 못합니다!" 영사는 그 대답에 놀라고도 재미있어하며 주저 없이 모두의 여권을 승인해 주었다. 이후 바바는 여행 계획을 다시 검토하고, 경비를 아끼기 위해 바그다드 대신 반다르 아바스 경유로 이란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 결정에 따라 2월 15일 공식 합의서에 추가 조항이 작성되었고 만달리는 인지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아래 서명자는 각자의 자유의사에 따라 페르시아로 간다는 점을 이에 선언하고 동의한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든 신체적, 정신적, 재정적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으며, 우리가 바바와 함께 있는 동안 여행의 결과든 그 밖의 일이든 메헤르 바바는 어떤 식으로도 책임이 없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동 경로는 다시 바뀌어 결국 바그다드 경유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또 바바를 동행하는 인원은 여덟 명으로 한정하기로 했다. 다른 만달리는 각자 집에 머물다가 바바가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뒤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나발은 이미 반다르 아바스 경유 증기선 표를 사둔 상태였다. 표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추가 비용 없이 변경을 해냈다. 다만 페르시아 여러 사람에게 보낸 전보 비용은 막대하게 들었다.
바루차 빌딩에 머무는 동안 바바는 만달리에게 세 차례 24시간 단식을 명했다. 또 페르시아 출발이 2월 14일에서 22일로 한 번 더 미뤄지면서, 바바의 생일은 1924년 2월 19일 화요일에 다시 기념되었다. 바바는 때때로 정원의 장미라 부르던 메헤라를 보려고 일부러 이라니 맨션을 찾곤 했다. 그는 나발과 부르조르의 집도 방문했다.
2월 22일 바바는 새벽 3시에 뜻밖에 만달리를 깨워 물었다. "오늘 페르시아로 떠날까, 말까?"
베흐람지가 며칠째 열병을 앓고 있었기에 모두는 연기를 원했다.
하지만 바바는 출발을 원하며 단호히 말했다. "우리는 오늘 가야 한다. 준비해라."
짐은 소달구지로 부두에 먼저 보내졌고 일행은 매우 급히 떠났다.
그들은 오전 7시 30분 SS 바렐라호에 승선했고, 두 시간 뒤 봄베이 항을 출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