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5월 15일 화요일 오후 4시, 구루프라사드에서 람 신디 카왈이 출연하는 또 한 차례의 음악 프로그램이 열렸다. 그 프로그램은 두 시간 동안 이어졌고, 푸나의 현지 연인들도 참석할 수 있었다. 아디는 다케와 함께 아흐메드나가르에서 이틀 동안 와 있었고, 그들은 벨가움의 토지와 비슈누의 다른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바바와 의논했다. 그 논의는 다음 날 메헤르지, 에루치, 람주, 사다시브 파틸과 함께 계속되었다. 수실라가 와서 바바를 잠깐 만났다.1
비슈누의 친척인 할단카르 가족은 17일에 와서 바바 앞에서 울며, 비슈누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할단카르는 자신의 고소를 무조건 철회한다는 문서에 서명했고, 바바도 이를 수락했다는 뜻으로 부서명했다.
판사였던 프렘 킬나니는 법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불려왔다. 논의 도중 킬나니가 바바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런 방식으로 타협을 성립시키는 편이 더 좋겠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바바가 답했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안다!"
1962년 5월 27일 일요일, 동서양 모임의 숙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푸나 일꾼들의 또 한 차례 회의가 열렸다. 케샤브 니감은 6월 2일에 도착했다.
바바가 메헤라자드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와 함께하는 일요일 모임이 몇 차례 더 있었다. 6월 3일 일요일, 파트와르단이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리사이틀을 했다. 바바는 그것을 몹시 즐겨서, 그 가수를 포옹하며 자신의 손수건을 주었다. 모인 이들 가운데에는 조셉과 카리 하브도 있었다. 발 나투는 여름 휴가 동안 구루프라사드에 머물고 있다가, 그날 쿠르두와디에 있는 집으로 떠났다.
1962년 6월 4일 저녁 7시, 조셉은 바바가 1956년과 1958년에 미국을 두 차례 방문했을 때 찍은 슬라이드를 바바에게 보여주었다. 약 100명의 가까운 연인들이 참석했다. 슬라이드 상영이 시작되기 직전에 바바가 캄라 반다리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 각자 안에서 나 자신을 본다. 이 하나됨의 체험은 유일무이하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고, 오직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한하다."
어느 일요일 모임에서 한 변호사가 바바에게, 자기 아들 고빈드가 바바가 오랜 침묵을 깰 때 실제로 들리게 말씀하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바바는 그 소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들리게 말할 것이다." 하고 그가 손짓했다. "사실 내가 침묵을 깰 때, 그것은 누구의 가장 큰 목소리보다도 무한히 더 분명하게 들릴 것이다."
각주
- 1.비슈누가 죽은 뒤 수실라는 하부 메헤라바드의 옛 다람살라에 딸린, 그녀를 위해 지은 방으로 옮겨 메헤라바드에 영구히 정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