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바바는 몇 가지 영적 설명을 더하며, 자신의 영적 위상과 앞으로 수행해야 할 신적 의무들, 그리고 그로 인해 겪어야 할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바바의 지시에 따라 사다시브 파틸은 차투르싱지 근처 퍼거슨 칼리지 로드 변, 망고와 시타풀 나무로 둘러싸인 황량한 들판에 초가 오두막을 세웠다.1 사다시브는 1922년 1월 27일 금요일 푸나 역에서 바바를 맞아 곧장 그 오두막으로 모셨다. 바바는 흡족해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사다시브의 등을 두드리고 말했다. "샤바쉬(잘했다)!"
땅 주인은 뜻밖에도 바바의 학창 시절 친구였고, 누가 그곳을 쓰는지 알게 되자 임대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바바는 조프디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이 목가적인 곳은 곧 축제 같은 분위기를 띠었고, 지역 주민들과 행인들 사이에서 "이란인 성자" 메헤르 바바의 거처로 알려졌다. 소박한 오두막은 텐트형으로, 대나무와 짚으로 짓고 바닥은 흙바닥이었다. 길이 10피트, 너비 약 5피트, 높이 8피트로 두 사람이 들어가기엔 충분했다. 걸쇠를 채울 수 있는 짚문도 달려 있었다. 마스터는 밤에 쉬기 위해서만 그 오두막을 사용했다. 낮에는 밖의 나무 그늘에서 쉬었고, 사람들은 그 둘레에 모여 많은 시간을 힌디어 바잔이나 우르두 가잘을 부르며 보냈다. 때로는 길리단다와 아티야파티야 놀이를 했고, 또 다른 때에는 영적 주제와 신실현의 길에 대해 강론했다. 오두막 안에는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밤에는 베일리만 경비를 겸해 바바 곁에 있었는데, 얼마 후에는 담배 상인 아르준 수페카르도 야간 경비를 나눠 맡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면 바바는 어린 시절 친구 코두가 가져온 차와 아침 식사를 했다. 9시쯤이면 카스바 페트의 다른 남자들이 와서, 아르준이 이끄는 노래로 마스터를 즐겁게 했다. 오전 10시 30분쯤 바바는 추종자들과 함께 카스바 페트의 타디 가게(약 1마일 거리)로 걸어가 우편물을 찾았다. 그 뒤 점심을 위해 765 버틀러 모할라에 있는 가족 집으로 걸어갔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 어린 여동생과 잠시 시간을 보낸 뒤 오두막으로 돌아와 신문을 읽고, 서신에 대한 짤막한 답장을 베일리에게 구술했다.
각주
- 1.이 오두막은 당시 유명한 방갈로인 모티 바우그(Moti Baug) 맞은편에 지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