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동안 마시는 우유의 양은 한 시어 반을 넘겨서는 안 된다. 설탕의 양은 하루 동안 여덟 큰술을 넘겨서는 안 된다. 물과 탄산 소다수는 원하는 만큼 마셔도 된다.
1941년 8월 1일부터 1942년 2월 15일까지 구스타지 한소티아, K. J. 플리더, 스와미 바바난다, 사바크 코트왈은 내가 지시하는 대로 산중 은둔에 들어가게 된다.
1941년에 맞게 될 마흔일곱 번째 생일에 관해, 바바는 이미 이렇게 발표했다:
올해는 영적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이므로, 2월 15일인 나의 생일은 공개적으로도 사적으로도 기념되지 않을 것이다.
메모는 바바의 말대로 "다른 이들에게 자제력을 발휘할 충분한 기회를 주기 위해" 아들 잘바이와 함께 1941년 2월 17일 자이푸르에 도착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이 도착했을 때 바바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빈민 구제 프로그램을 도왔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 아그라왈은 자이푸르의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는 바바에게 공개 다르샨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지만 바바는 거절했다. 그러나 바바는 노리나가 자이푸르에서 자신에 관한 강연을 두 차례 하는 것은 허락했다. 하나는 1월 18일 변호사들 모임에서, 다른 하나는 2월 13일 일반 대중을 상대로였다.
그 뒤 데쉬무크 박사는 자신이 철학을 가르치던 나그푸르 대학에서 노리나가 강연해 달라고 초청했다. 바바의 동의를 얻어 그녀는 2월 18일 그곳으로 갔다. 그녀의 강연은 매우 큰 효과를 발휘해서, 람 P. 판크라지, 압둘 마지드 칸, 나라얀(나나) 고팔 케르라는 세 학생이 그녀의 말을 듣고 바바와 가까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압둘 칸은 최근 어머니를 여의었고,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며칠 동안 울었다. 하지만 노리나의 강연 뒤 그는 그녀의 말에 깊이 감명받아 면담을 요청했고, 강연 다음 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데쉬무크의 집으로 갔다. 압둘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자신이 얼마나 우울했는지 노리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노리나는 그에게 바바에 대해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그는 큰 위로를 받아 노리나를 "하나님의 천사"로 여겼고, 자신의 모든 슬픔과 비탄이 사라졌다.
나중에 노리나는 그 젊은이에 대해 바바에게 이야기했고, 바바는 그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고 느껴라."
바바와 일행의 퀘타 행 여정은 이미 준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에루치는 방갈로르에서 자이푸르로 불려와 블루 버스를 운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엘리자베스는 바바와 메헤라, 그리고 몇몇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 자신의 차를 몰게 되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