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류의 무지와 사람들이 삶의 더 높은 가치들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무한한 고통을 겪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마야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고 싶지만, 그들은 그 안에 계속 얽매여 있기를 바랍니다!
사로쉬는 이 담화에 매우 흡족해했고, 빌루에게도 그것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바바에게 절을 하고 떠났다.
영국에서 의사 시험을 통과한 스물여덟 살의 윌리엄 돈킨 박사는 1939년 7월 27일 봄베이에 도착했다. 카카와 찬지가 그를 맞이했고, 다음 날 그가 초청받은 알루 캄바타의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런 다음 카카와 찬지는 그를 푸나를 거쳐 메헤라바드로 데려왔고, 그는 29일 바바의 만달리에 합류했다.1 그날부터 바바와 다른 모든 사람은 그를 돈이라고 불렀다. "런던에서 사랑하는 님을 처음 보았을 때 돈이 맛본 그 포도주는," 에이지가 평했다. "돈으로 하여금 모든 세속적 쾌락과 추구를 포기하게 했고, 그를 영원히 바바의 발 아래로 이끌었다."
바바가 곧 메헤라바드를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1939년 7월 30일 일요일에는 나오로지와 그의 가족, 찬지의 누이를 비롯한 많은 방문객이 그를 만나러 왔다.
7월 30일까지는 잘 케라왈라가 모두를 위한 거처를 마련해 둔 자발푸르로 남녀 아쉬람을 옮기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의가 계속되었다. 바바는 케라왈라에게 8월 1일부터 자발푸르에 머물겠다고 알려 두었고, 만들라에 센터를 여는 문제를 두고도 긴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케라왈라는 자신이 인도의 다른 지역으로 전근된다는 통보를 갑자기 받았다. 바바는 자발푸르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계획을 바꿔, 대신 3년 전 자신과 여성들이 머물렀던 마이소르로 본부를 옮기기로 했다.
자발푸르에서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기 때문에 만달리는 충격을 받았다. 마이소르에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바바는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8월 1일 바바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혼란과 혼돈 속에서 내 일이 이루어집니다. 일종의 정화 과정과도 같습니다. 잘 케라왈라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태를 이렇게 돌려놓은 것은 나의 열쇠였습니다."
찬지와 칼레마마는 마이소르에서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즉시 보내졌고, 에루치와 파파 제사왈라는 만들라의 부동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자발푸르로 보내졌다.
바바 자신은 1939년 8월 2일 수요일 오전 6시 30분에 메헤라바드를 떠났다. 그는 메헤라, 마니, 나자, 코르셰드와 함께 엘리자베스의 새 뷰익을 타고 갔고, 블루 버스에는 다른 여성들이 탔다.
각주
- 1.잘바이도 7월 29일 푸나에서 도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