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는 다시 이 두 초기 추종자에게 자기와 만달리 곁에 와서 함께 지내라고 권했으며, 특히 부아사헵이 자기 곁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부아사헵은 사업상의 의무를 내세워 사양했고, 이에 바바는 재정적 부담 전부를 자신이 떠맡아 부아사헵에게 어떤 금전적 책임도 지우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그런 취지의 합의서까지 작성되었지만, 나중에 부아사헵이 거기서 물러나 그 문서는 찢어 버려졌다. 뒤이은 일들을 돌이켜 보면, 이것은 부아사헵을 구하려는 바바의 시도였다.
25일 아침 5시 30분, 바바와 여자들은 로나블라를 떠나 메헤라바드로 향했고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에 도착했다. 메헤라바드로 돌아오자마자 만들라나 자발푸르에 센터를 세우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서양 여자들은 만들라를 좋아했고, 바바도 역시 그렇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 뒤 노리나는 그곳에 센터를 세우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바바는 밤이면 언덕 위에서 잤지만, 5월 27일 밤에는 내려와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카드놀이를 만달리와 함께 했다. (진 사람들은 벌로 바바에게 막대기로 한 대씩 맞았다.) 바바는 한동안 밤마다 이런 카드놀이를 계속했고, 밤 9시면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가 잠을 잤다.
29일 아침, 바바는 베일리와 가니, 찬지와 함께 《메헤르 바바 저널》과 같은 성격의 구자라트어 잡지를 시작하자는 제안에 대해 논의했다. 그날 저녁 바바는 머스트 아쉬람 수용자들의 바잔 공연과 춤을 즐기기 위해 언덕에서 내려왔다.
1939년 6월, 바바는 데쉬무크와 노리나, 나딘을 봄베이와 푸나, 나식로 강연하러 보냈다.1 그들은 대중 앞에서 효과적으로 연설했고(주제는 "현재의 영적 위기"였다), 이라니 대령과 그 동조자들이 여전히 바바에 대해 퍼뜨리던 부정적인 견해와 소문 일부에 맞섰다. 그들은 또한 대중에게 유니버설 센터 개설 제안도 알렸다.
바바가 6개월 만에 다시 메헤라바드에 머물게 되자, 1939년 6월 4일 일요일에는 사타 가족과 사로시, 빌루, 인두 데쉬무크, 마넥 란지, 미누 포호왈라, 가데카르, 다케와 그의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각주
- 1.데쉬무크는 대학 방학 때마다 바바를 자주 찾아왔고, 바바의 지시에 따라 일을 수행하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