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그는 내가 전하러 온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될 것이다.
이 진리는 인간이 시간과 공간과 관습이라는 환상에 완전히 묶인 제한되고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본성상 영원하며 자원 또한 무한한 존재라는 앎이다. 세계라는 환상은 그가 상상해 낸 꿈이며, 그의 의식이라는 극장에서 상연되는 한 편의 연극이다. 그 연극에서 그는 동시에 작가이자 제작자이자 감독이자 주연이다. 그러나 스스로 택해 연기하는 그 역할에 몰입한 나머지 그는 참자아를 잊어버렸고, 이제 자신이 만든 길 위를 한 피조물처럼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참된 본성으로 깨어나야 한다. 그는 모든 물질적 표현이 영적 존재에 의존하며 그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고 평온할 것이다. 그때는 더 이상 불황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불황은 사라질 것이다.
이제 영화는 인간이 이런 깨달음에 이르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영화의 성격 자체를 바꿀 필요는 없다. 사랑과 로맨스와 모험은 그 자체로 근본적인 요소들이다. 그것들은 가능한 한 짜릿하고, 재미있고, 고무적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호소 범위가 넓을수록 더 좋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강조점, 곧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이다. 예를 들어 용기는 위대한 덕목이지만, 잘못 쓰이면 악덕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삶의 원동력인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실현의 높은 경지로 이끌 수도 있고 절망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다. 사랑의 두 극성과 그 효과를 이보다 잘 보여 주는 예는, 예수를 만나기 전과 후의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다.1
이 두 극단 사이에는 많은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모두 좋지만 그중 일부는 다른 것보다 더 낫다. 내가 "좋은"과 "더 좋은"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것들이 이끌거나 부여하는 해방의 정도를 가리키기 위해서일 뿐이다. 육체적 욕망으로 표현되는 사랑조차, 개인적 호오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다른 모든 것보다 먼저 사랑하는 이를 섬기고자 하게 만드는 만큼은 좋은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사랑에 바탕을 두며, 그 사랑의 성격이 영원하냐 일시적이냐에 따라 지속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예컨대 결혼은 그것을 고무하고 지탱하는 사랑의 성격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해지고, 고양되거나 타락하며, 오래가거나 덧없이 스쳐 간다.
각주
- 1.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다(그러나 일부 성서학자들은 그녀가 창녀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