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쉬 카이쿠쉬루 이라니는 1903년 4월 22일, 카이쿠쉬루 아르데시르 이라니(엘더 카이쿠쉬루라 불렸다)와 굴나르(굴바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칸사헵 카이쿠쉬루 사로쉬 이라니와 인척이자 동업자였으므로, 사로쉬는 굴마이의 조카이자 루스톰과 아디 K. 이라니의 사촌이었다. 형제로는 딘쇼와 모타 등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흐메드나가르에서 메헤르 바바에게 가장 완강히 반대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오랫동안 집안에서 바바를 공경한 사람은 사로쉬뿐이었다.
1922년 열아홉 살의 사로쉬는 판치가니의 기숙학교를 그만두고 푸나에 들렀는데, 마침 굴마이가 그곳에서 바바를 찾아와 있었다. 그는 바바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지만 믿음이 없어 가까이 가지 않았다. 바바는 그 청년이 누구인지 묻고는 "나중에 세상에서 그를 통해 할 일이 많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튿날 바바를 만나자 사로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그는 바바의 발치에 엎드렸다. 바바는 그를 푸나에서 전기 기술을 배우게 했고, 그때부터 사로쉬는 바바의 가까운 써클에 속하게 되었다. 봄베이의 만질-에-밈에서 그는 자동차 정비를 배웠는데, 매일 저녁 바바는 그를 끌어안으며 "여기 나의 왕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질 시기가 끝난 뒤 바바는 사로쉬에게 아흐메드나가르에서 자동차 사업을 시작하라고 권했다. 사업은 번창했고, 그는 아흐메드나가르 시장으로 여러 번 선출되었다. 『로드 메허』는 그가 아무리 영향력이 커져도 평생 바바에게 충실했고 바바를 섬기는 데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그는 1927년 3월 23일 바바의 허락을 받아 푸나에서 빌루와 결혼했다. 빌루는 처음에는 바바에 대한 의심을 공공연히 드러냈지만, 세월이 흐르며 바바에게 헌신하게 되어 남편과 함께 일했다. 『로드 메허』는 사로쉬를 "세상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스승의 확고한 제자이자 만달리의 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로쉬는 여러 실제적인 방식으로 바바를 섬겼다. 1949년 8월 새로운 삶을 앞둔 회의에서 그는 당시 바바와 함께 지내던 모든 남녀를 홀로 부양하겠다고 가장 먼저 나섰다. 1952년 그는 바바와 함께 미국에 가서 대륙 횡단 여행에서 두 번째 차를 몰았고, 그곳에서 자신이 아흐메드나가르 시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전보를 받았다. 1952년 5월 오클라호마주 프라그 근처에서 교통사고가 난 뒤 그는 인도의 헌신자들을 다시는 볼 낯이 없다며 울었다. 1954년에는 메헤라바드를 찾은 서양인 방문객들의 숙소를 마련했고, 그와 빌루는 자주 자택 빌루 빌라에서 바바의 손님들을 맞는 일을 맡았다.
1962년 사로쉬는 비슈누의 뒤를 이어 아바타 메헤르 바바 트러스트의 이사가 되었고, 쿠쉬루 쿼터스에 있던 아흐메드나가르 센터의 두 방을 하나의 큰 홀로 넓히는 개보수 위원회를 이끌었다. 바바는 1962년 10월 21일 새 홀의 개관을 선언했다. 1967년에는 시장으로서 바바의 큰 사진을 실은 지프를 앞세워 아흐메드나가르 시내를 도는 탄신 행진을 마련했다. 바바가 육신을 떠난 직후인 1969년 2월 초, 메헤라바드의 바바 묘소 안에 있는 사로쉬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는 1973년 1월 9일 세상을 떠나 하부 메헤라바드에 묻혔다. 그의 묘석에는 칸사헵 사로쉬 K. 이라니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