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톰 카이쿠쉬루 이라니는 1898년 7월 4일 아흐메드나가르에서 카이쿠쉬루 사로쉬 이라니(칸사헵이라 불렸다)와 굴마이 이라니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은 아디 K. 이라니(아디 시니어)였고, 누이로 피로자와 돌리가 있었다. 그는 봄베이의 바르다 뉴 고등학교와 세인트 자비에르 칼리지, 시드넘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어머니 굴마이를 통해 온 가족이 메헤르 바바를 만나게 되었고, 『로드 메허』는 굴마이와 남편, 자녀들이 자신들의 삶과 재산을 바바의 대의에 바쳤다고 기록한다.
루스톰은 1922년 봄베이의 만질-에-밈에서 바바와 함께 지냈다. 우파스니 마하라지의 전기를 펴내기 위해 그의 법적 명의 아래 써클 앤 컴퍼니라는 출판사가 세워졌고, 그는 바지프다르와 함께 봄베이 곳곳을 걸어 다니며 책을 팔았다. 1923년 초 바바는 다울랏마이에게 딸 프레이니(피로자, 메헤라의 언니)를 루스톰과 혼인시킬 뜻이 있는지 물었고, 두 사람은 만질에서 약혼했다. 두 사람은 1923년 5월 9일 아흐메드나가르에서 결혼했다. 부부는 메흘루, 팔루, 메헤루, 나구, 베흐람, 장구의 여섯 자녀를 두었고, 그중 메헤루가 훗날 여성 만달리의 일원으로 선택되었다.
루스톰은 가족과 함께 아흐메드나가르에 살았지만 바바의 명령 아래 있었고, 새로 생긴 메헤라바드 공동체의 물자 조달을 맡았다. 그는 친척 대부분과 지역 조로아스터교 공동체의 적대 속에서도 아디와 함께 메헤라바드의 살림을 뒷받침했다. 1925년 그는 베흐람지 아래 메헤라바드의 부감독으로 임명되었고, 1927년 바바는 그에게 만달리 관리자인 바라 사헵(큰 보스)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1928년 봄 바바는 메헤르아쉬람에 영국 소년들을 데려오도록 그를 영국에 보냈다. 소년들은 오지 않았지만 그는 런던에서 메러디스 스타를 만났고, 사두 크리스천 레이크는 훗날 바바가 서양과의 연결을 맺으려고 루스톰을 영국에 보냈다고 썼다.
루스톰은 수완 있는 사업가였다. 그는 집안의 사로쉬 모터 웍스 나식 지점을 열었고, 바바는 아쉬람 출신 소년들과 여러 만달리를 그곳에서 일하게 했다. 1931년 1월 그는 메헤르 필름 컴퍼니를 세웠고, 1931년 2월 28일 바바는 나식에 새로 지은 루스톰의 영화관 써클 시네마의 개관식을 거행했다. 1931년 8월 루스톰은 바바의 첫 서양 여행에 찬지, 아가 알리와 함께 SS 라지푸타나호를 타고 동행했다. 1932년 바바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답하며, 가까운 제자 루스톰이 그 수입을 바바의 일에 쓸 수 있도록 영화관과 자동차 정비소를 자신에게 바쳤다고 밝혔다. 1935년 바바는 상하이에서 그를 만나, 노리나 마차벨리, 엘리자베스 패터슨과 함께하는 영화 작업의 대리인으로 그를 뉴욕과 할리우드에 보냈다.
루스톰 자신의 영화는 1938년에 완성되었다. 메헤르 바바 트래블스에 따르면 제목은 "완전한 사람(The Perfect Man, 니가-에-카밀)"이었고 써클 픽처스가 제작했으며, 루스톰이 감독, 제작, 각본, 주연을 모두 맡았고, 나식의 써클 극장에서 열린 첫 상영회에 바바도 참석했다. 『로드 메허』는 개봉 첫날 흥행 수입이 실망스러웠지만 바바가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기록한다.
바바와 함께한 그의 마지막 몇 해는 순탄하지 않았다. 프레이니가 정신적으로 무너졌고, 1939년 3월 루스톰은 바바만 아는 곳으로 떠나기로 정해졌다. 『로드 메허』에 따르면 루스톰은 큰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이따금 말없이 사라지곤 했는데, 1939년에 영영 사라져 가족과 만달리 누구도 다시는 그를 보거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다만 바바에게는 몇 차례 편지를 보냈다. 메헤르 바바 트래블스는 그가 히말라야로 들어갔으며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적지만, 『로드 메허』에는 그 날짜가 나오지 않는다. 1954년 바바는 루스톰의 아들 팔루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나를 위해 참으로 큰 사랑과 큰 희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지금 당신의 모습을 통해 다시 육체적으로 나를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