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쿠쉬루 에스판디아르 아프세리, 훗날 라오사헵으로 불린 그는 동료 이라니인 아르데시르와 베흐람지를 통해 메헤르 바바를 알게 된 페르시아인이었다. 1922년 그는 바바의 다르샨을 받으려고 봄베이의 만질-에-밈에 두 번 찾아갔으나 두 번 다 돌아서야 했다. 크게 실망한 그는 다시는 바바를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꿈에 바바가 나타나 말했다. "사드구루의 궁정에서는 개처럼 살아야 합니다! 쫓겨나더라도 들어갈 문을 구걸하며 오고 또 와야 합니다." 그 꿈 뒤로 마음이 들끓던 그는 바이둘을 만났고, 바이둘은 1924년 그를 봄베이의 바루차 빌딩에 있던 바바에게 데려갔다. 무엇을 원하는지 바바가 묻자 그는 "당신의 다르바르에 머무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바바는 부르는 즉시 올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고 일렀다.
약 1년 뒤 바바는 그를 메헤라바드로 불렀고, 그는 만달리와 함께 살며 병원 야간 근무를 맡고 페르시아어로 바바에 관한 글을 썼다. 1927년 바바가 아쉬람 책임자들에게 직함을 줄 때 아프세리는 기숙 담당 관리자 "라오사헵"이 되었다. 그는 메헤르아쉬람 학교에서 페르시아어 회화를 가르치고 아쉬람의 등불을 관리했으며, 무엇보다 아가 알리와 알리 악바르(훗날의 알로바)를 비롯한 프렘 아쉬람의 페르시아 소년들을 맡았다. 소년들이 강렬한 영적 체험을 하던 시기에 만달리 가운데 그만이 소년들과 함께 바바 곁에 앉을 수 있었고, 그는 바바의 메시지를 페르시아어로 소년들에게 읽어 주었다.
1929년 2월 바바는 그를 다섯 명의 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았다. 그가 쓴 『카슈풀-하카야케』(진리의 계시)는 메헤르 바바와 메헤르아쉬람, 프렘 아쉬람에 관해 페르시아어로 출판된 첫 책이었다. 라오사헵은 바바와 함께 널리 여행했다. 1929년 페르시아 여행에서 바바는 그를 "모두를 단호하게 다루는 우리의 총지배인"라고 묘사했고, 그는 버스와 전보, 숙소를 마련했다. 1930년에는 바바와 함께 카슈미르에, 1931년에는 다시 페르시아에 갔으며, 1932년에는 중국으로 보내진 만달리 여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승과의 삶은 그를 시험했다. 1930년 그는 바바의 일에 쓸 돈을 마련하려고 봄베이에 있는 자신의 식당을 팔겠다고 나섰지만, 바바가 정한 날보다 하루 늦게 거의 5,000루피를 들고 돌아왔다. 바바는 그 돈을 불 속에 던지게 하고 "나는 재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을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1937년 무렵 라오사헵은 봄베이로 돌아가 이따금 메헤라바드에 들르게 되었다. 바바는 훗날 그가 떠난 것은 바바 때문이 아니라 다른 만달리와의 갈등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바바는 계속 그에게 편지를 보냈고, 1942년 로나블라로 이사해 있던 라오사헵은 바바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만달리의 식사를 마련하는 일로 봉사하게 되어 몹시 기뻐했다.
1958년 메헤라바드 사하바스에서 바바는 그를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나의 아주 오래된 친구입니다. 그는 나를 깊이 사랑합니다"라고 소개하고, 무대에서 하피즈의 시를 페르시아어로 낭송하게 했다. 1964년 바바는 죽은 뒤 메헤라바드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청을 허락했다. 1969년 2월 바바의 몸이 묘소에 안치되었을 때, 한때 황홀경에 빠진 프렘 아쉬람 소년들을 다잡던 라오사헵은 울면서 묘소의 돌벽에 머리를 찧어 사람들이 말려야 했다. 바바는 일찍이 그에게, 그는 바바가 몸을 벗은 뒤에야 죽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