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드리
Padri
파레둔 나우로스지 드라이버
진료소 약제사이자 메헤라바드 관리자, 트러스트 창립 이사
전기
파레둔 나우로스지 드라이버는 흔히 "파드리"로 불렸으며, 메헤르 바바의 가장 초기 제자이자 가장 꿋꿋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22년부터 1969년 바바가 육신을 떠날 때까지 스승을 섬겼다. 거의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관계였다. 1903년 11월 29일 인도 푸나에서 태어난 파드리는 메헤르 바바의 측근들과 깊은 인연이 있는 조로아스터교 이라니 집안 출신이었다.
파드리의 집안은 메헤르 바바의 만달리와 놀라울 만큼 얽혀 있었다. 어머니 프레이니 소랍 이라니(프레이니 마시라고도 불림, 1874년생)는 메헤라의 어머니 다울랏의 언니였다. 그래서 파드리는 메헤르 바바의 으뜸가는 여성 제자 메헤라와 사촌 사이였다. 프레이니의 남동생은 메르완 소라브 이라니 대령으로, 그는 거의 35년 동안 바바를 헐뜯는 거짓 선전을 퍼뜨렸다. 이런 집안 내력 덕분에 파드리의 운명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메헤르 바바의 사명과 맞닿아 있었다.
파드리는 노우로즈 드라이버와 프레이니 사이에 태어난 네 자녀 가운데 하나였다. 형제로는 루시(맏이로 바바의 학창 시절 동급생이었으며, 미국 콜로라도 광산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평생 미국에서 살았다), 케키, 호미가 있었다. 그는 푸나 캠프 공립 영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메헤르 바바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해 사제 같은 풍채를 지닌 파레둔에게 "파드리"(사제, 신부라는 뜻)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바바가 제자들에게 붙여 준 다른 많은 별명처럼, 이 별명은 전 세계 바바 공동체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1922년, 열여덟 살의 파드리는 봄베이에 있던 바바의 첫 아쉬람 만질-에-밈에서 메헤르 바바와 함께 살며 섬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찍 헌신한 덕분에 그는 바바의 작업이 형성되던 시기를 목격하고 함께한 최초의 제자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본래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했던 파드리는 실용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었고, 이 기술은 고된 아쉬람 생활에서 큰 힘이 되었다.
메헤르 바바가 아쉬람을 아흐메드나가르 지역으로 옮겨 메헤라바드를 세웠을 때 파드리도 그 뒤를 따랐다. 바바는 파드리를 메헤라바드의 네 "기둥" 가운데 하나로 지명했다. 훗날 메헤르 바바의 사마디(무덤 사당)가 들어설 이 성스러운 곳을 운영하고 지키는 데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인정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파드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동종요법을 공부해 의사가 된 그는 메헤라바드 주변 마을 사람들을 치료했다. 이 봉사는 사심 없는 봉사를 영적 성장의 길로 강조한 바바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 준다. 파드리의 동종요법 진료는 그 지역에 널리 알려졌고, 그는 수십 년 동안 치유의 일을 이어 갔다.
파드리는 영성에 대해 군더더기 없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스승에 대한 순종을 앞세웠고, 겉으로 드러내는 감상에는 좀처럼 참을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장 유명한 말은 영적 길을 대하는 이런 실제적이고 담백한 태도를 잘 보여 준다. "사랑은 성자들과 머스트들의 몫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이 말은 사랑의 중요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겸손의 표현이었다. 파드리는 자신의 역할을 그저 스승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여겼고, 신성한 사랑의 높은 경지는 영적으로 더 나아간 이들에게 맡겼다.
한 일화는 동료 만달리 펜두와 파드리의 가까운 우정, 그리고 파드리의 순종을 함께 보여 준다.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파드리가 일꾼인 나나와 타니의 친척들이 메헤라바드를 찾아오도록 허락한 사실을 안 바바는, 펜두를 시켜 이 일을 두고 파드리를 다그치게 했다. 펜두와 파드리는 절친한 친구였지만, 펜두는 바바가 원한 대로 온 마음을 다해 파드리를 꾸짖었다. 개인적인 우정조차 스승의 지시 앞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이 일은 바바의 규율이 아쉬람 생활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미쳤음을 보여 준다. 타니가 만달리 욕실에서 목욕하는 일과 나나가 메헤라바드에서 타작 마당을 쓰는 일도 모두 문제가 되었다. 바바는 파드리에게 이런 특혜를 그만두게 하되 일꾼들을 내보내지는 말라고 지시했다.
1969년 1월 메헤르 바바가 육신을 떠난 뒤에도 파드리는 메헤라바드에서 헌신적인 봉사를 이어 갔다. 순례자들을 안내하고, 자신이 일구는 데 힘을 보탠 이곳의 거룩한 분위기를 지켰다. 그는 방문객들에게 바바의 사마디를 안내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바바와 그를 찾아온 이들 사이를 이어 주었다.
1974년과 1975년에 스티븐 하인은 파드리와 다른 만달리들을 비디오로 촬영해, 그들의 기억과 가르침을 담은 귀중한 영상을 남겼다. 1975년 1월 메헤라바드에서 주로 호주 순례자들과 함께 촬영된 이 "만달리 모먼츠(Mandali Moments)" 영상은 훗날 전문가 수준의 화질로 변환되어, 그 시대를 전하는 소중한 역사 자료로 남아 있다.
1982년 3월 13일, 파드리는 60년 동안 섬겨 온 메헤라바드에서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사랑하는 스승의 사마디가 바라보이는 하부 메헤라바드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그의 생년월일이 1903년 11월 29일로 새겨져 있다.
파드리의 유산은 그가 메헤라바드에 세우고 가꾸는 데 힘을 보탠 건물들, 그가 치료한 마을 사람들, 그가 사마디로 안내한 순례자들, 그리고 스승에 대한 소박하고 흔들림 없는 순종의 본보기 속에 살아 있다. 영적 체험을 좇기보다 명령을 따르는 데 온전히 집중한, 실제적이고 겸손한 그의 제자의 길은 아바타에게 내맡기는 참된 길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준다.
사진 갤러리(37 장)
생애 연표
11월 29일 인도 푸나에서 파레둔 나우로스지 드라이버로 태어남
바바의 첫 아쉬람 만질-에-밈에서 메헤르 바바와 함께 살며 섬기기 시작
다른 만달리와 함께 바바를 따라 퀘타(당시 영국령 인도 발루치스탄, 지금의 파키스탄)로 감
메헤라바드에서 바바의 오두막 내부를 칠함
메헤르 바바가 떠난 뒤에도 봉사를 이어 가며 사마디에서 순례자들을 안내
스티븐 하인이 메헤라바드에서 촬영한 '만달리 모먼츠' 영상 시리즈에 담김
3월 13일 메헤라바드에서 78세로 별세. 하부 메헤라바드에 안장
말씀
“개인적으로 나는 동종요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나는 오직 당신, 파드리에게만 치료받고 싶습니다.
(1947년 메헤라바드 동종요법 진료소에서 파드리와 무를리에게 누가 동종요법을 가장 잘 아는지 물은 뒤 한 말, 『로드 메허』 2608쪽)
“올 수 있을 때마다 오십시오. 내 문은 늘 당신에게 열려 있습니다.
(1922년 2월 푸나. 열여덟 살의 파레둔(훗날의 파드리)은 어머니의 전갈만 전하러 바바의 오두막에 왔다. 바바는 그를 앉게 하고 프라사드를 나누어 준 뒤, 무거운 마음으로 일어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 이름은 파드리입니다.
(1923년, 바바가 만달리와 농담을 주고받던 중 누군가 키 크고 엄숙한 파레둔이 가톨릭 신부(파드레) 같다고 했다. 바바는 그 자리에서 그가 평생 쓰게 될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당신들은 나를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다고 맹세하면서, 물집 하나에 불평합니다. 이건 목숨을 내놓는 일의 시작조차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징징대고 웁니다. … 입을 다물고 내가 당신들을 조금씩 천천히 죽이게 두십시오. 용기는 손바닥 물집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1924년 4월 메헤라바드, 만달리가 고된 육체노동을 하던 때다. 바바가 한눈판다고 막 꾸짖은 뒤, 파드리는 다른 남자들 앞에서 물집 잡힌 손바닥을 바바에게 내보였다.)
“이 돼지 같은 놈! 나는 세 시간째 목이 말랐는데 당신은 잠만 잤습니다! 내 손뼉 소리에도 당신은 깨지 않습니다. 당신은 쿰바 카르나의 잠에라도 걸린 것입니까?
(1924년 5월 메헤라바드. 바바는 조프디에서 은둔 중이었고 파드리가 밤낮으로 창밖을 지켰다. 어느 밤 바바가 물을 청하며 손뼉을 쳤지만 파드리는 깨지 않았고, 아침에 그는 창밖에 놓인 이 쪽지를 발견했다.)
“절대 바바가 되지 마십시오!
(1924년 8월 남인도 여행 중이다. 열이 나고 먹지도 못할 만큼 아픈 바바는 일행과 함께 쿠누르에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자기는 고통받는데 다들 배불리 먹는다고 나무란 뒤, 바바는 파드리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로드 메허』는 이 말이 실은 베일리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적는다.)
“발에 차여도 울거나 불평하지 않는 축구공처럼 되십시오. 축구공의 운명은 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세게, 얼마나 높이 차여 오르느냐가 그 아름다움입니다. … 나의 차임은 당신들을 높이, 더 높이, 무한히 더 높이 그 너머로 올려줄 것입니다!
(1925년 6월 3일 메헤라바드. 병원 감독을 맡은 펜두와 약을 조제하던 파드리가 날마다 이어지는 바바의 지적에 지쳐 불만을 터뜨리자 바바가 해 준 말이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계속 약을 주십시오. 나는 계속 당신을 축복하겠습니다.
(같은 날 메헤라바드에서 펜두와 파드리에게 조언한 뒤 한 말이다. 당시 파드리는 바바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연 무료 진료소의 조제사였다.)
“그대의 편지를 비슈누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기둥들[파드리, 비슈누, 펜두, 아디 K. 이라니]을 언제나 전적으로 신뢰해 왔고, 지금도 그대의 고행에 대한 나의 믿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1942년 4월 18일. 메헤라바드에 있던 파드리가 자신이 겪는 어떤 문제를 바바에게 편지로 알리자, 바바는 이 전보를 구술해 답했다.)
“당신은 한 발은 옛 삶에, 한 발은 새로운 삶에 걸치고 있지만, 그 발이 찢겨 나갈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1949년 12월, 새로운 삶 초기다. 메헤라바드에 남아 있던 파드리는 돈을 마련해 모라다바드의 동행자들에게 가져오라는 바바의 지시를 신속히 해냈다. 바바는 그를 직접 만나지 않고 이 농담 섞인 전갈을 보냈다.)
“당신이 당신의 머리를 잘라 내게 주면 수카드왈라가 나를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당신도 영원토록 내게 오게 될 것입니다.
(1962년 12월 메헤라자드 만달리 홀에 가까운 이들 150명가량이 모였을 때다. 파드리가 키 작은 만체르샤 수카드왈라 앞에 앉는 바람에 수카드왈라는 바바를 볼 수 없었다.)
“이 의사들은 다 돌팔이들입니다! … 당신이 나에게 뭔가를 좀 주십시오.
(1969년 1월 말 메헤라자드, 바바의 마지막 나날이다. 양약이 경련을 전혀 누그러뜨리지 못하자 파드리는 10분마다 동종요법 약을 먹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