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지, 곧 루스톰 이라니는 메헤르 바바의 이모부였다. 그의 아내 피로자(필라 마시)가 바바의 어머니 쉬린의 자매였다. 집안에서는 그를 루스톰 마사라고 불렀고, 메헤르 바바 트래블스는 그에게 "엉클 피시(물고기 삼촌)"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1867년에 태어났다. 그와 필라 마시 사이에는 자라서 어른이 된 아스판디아르(펜두)와 나자가 있었고, 구스타드와 메헤라는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메르완이 데칸 칼리지에 다닐 때 그의 연극 단원들은 푸나 사차피르 거리의 이 집에서 연습했고, 메르완과 친구들은 넓은 마당에서 자주 크리켓을 했다.
1917년 필라 마시가 세상을 떠나자 마사지는 푸나에서 아흐메드나가르로 옮겨 술집의 서기로 일했고, 아이들은 이모 도울라 마시에게 가서 살았다. 1922년 메르완이 푸나에서 첫 제자들을 모으기 시작하자 이모부인 그가 저녁 식사를 날라 왔고, 봄베이의 만질-에-밈에서는 남자들 가운데 무슬림과 파르시, 이란인을 위해 요리했는데, 순수한 기를 아낌없이 써서 아무도 고기를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는 1923년 아랑가온에서 바바와 함께 머문 열네 명의 남자 가운데 하나였고, 두 자녀 나자와 펜두를 모두 바바를 섬기는 길에 바쳤다.
그 후 20년 동안 마사지는 바바가 맡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는 대부분의 만달리를 위한 요리사였고, 때로는 바바 곁의 야간 경비였으며, 1928년 토카에서는 아쉬람에 청소부가 없었기 때문에 메헤라바드에서 하던 대로 여성들의 화장실을 청소했다. 1924년 12월 바바가 벨가움으로 여행할 때는 그가 유일한 동행이었다. 그는 성미가 급했지만 장난을 좋아하고 유머가 넘쳤으며, 온 가슴으로 바바를 따른 강하고 거센 사람이었다.
바바를 향한 그의 사랑은 작은 일에서 드러났다. 1929년 라호르에서 출발한 기차 여행 중 바바가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않자 마사지도 자기 음식을 먹지 않았다. 까닭을 묻자 그는 "당신께서 지난 이틀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고, 오늘도 드시지 않습니다. 당신이 굶고 계신데 저는 식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바는 이를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내세웠다.
1944년 12월, 77세의 마사지는 공개적으로 치를 메헤라의 생일 잔치에 쓸 조리 기구를 빌리러 푸나에 갔다. 그는 12월 18일 트럭 한 대 분량의 물품을 싣고 메헤라바드로 돌아왔는데, 뙤약볕 아래 지붕 없는 트럭을 타고 온 탓에 몸이 상해 있었다. 이튿날인 12월 19일 오후, 그는 심장마비로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바바는 핌팔가온에서 와서 시신을 어루만지고, 관을 함께 메었으며, 무덤에 맨 먼저 흙을 뿌렸다. 나흘 뒤 바바는 세상을 떠난 제자들을 기리는 기념탑의 기초를 마사지의 무덤 위에 찬지의 침구와 함께 놓게 하고, 그를 "나의 사랑하는 마사지"라고 불렀다. 메헤르 바바 트래블스는 그가 1944년 1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고 적지만, 『로드 메허』는 19일로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