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 나이르는 케랄라 출신이다. 메헤르 바바 트래블스는 그의 출생지를 팔가트 지구의 칼루르 마을로 전한다. 1939년 10월, 바바가 방갈로르의 '링크스'라는 저택에 아쉬람을 열었을 때, 잘바이는 허름한 식당에서 일하던 이 어린 케랄라 소년을 발견해 바바에게 데려왔다. 그를 본 바바는 "당신은 나와 과거의 인연이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크리슈나는 바바를 직접 시중드는 일을 맡았다. 1940년 메헤라바드에서 바바가 방갈로르 소년들에게 인생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묻자 다른 소년들은 농사나 장사, 통가(마차)를 원했지만 크리슈나는 "당신을 원합니다, 바바!"라고 답했다.
크리슈나는 여러 해 동안 바바의 야간 경비를 맡았는데, 이는 때로 밤새도록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1942년 데라둔에서 한 여학생을 무례하게 물리친 뒤, 크리슈나는 바바에게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바바는 그가 결혼해 아들까지 두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그의 피로 '나는 결혼하지 않겠다'라는 서약을 쓰게 했고 그 종이는 비슈누가 보관했다. 1946년 9년 만에 어머니를 뵈러 휴가를 갔을 때 어머니가 결혼을 재촉하자, 바바는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십시오."라는 전보를 보냈고, 혼례는 12일 뒤에 치러졌다. 1949년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오자 바바는 만달리 앞에서 그 피의 서약을 꺼내 보이게 했다.
1947년 11월, 바바가 없는 사이 하인 소년 찬드라반을 때린 일로 크리슈나는 남인도의 집으로 보내져 1949년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전, 바바는 그를 동반자로 삼는 대신 인도 전역의 온갖 종교의 사원과 성지를 순례하게 했고, 순례는 일곱 달 반쯤 걸렸다. 그 뒤 크리슈나는 경찰이 되었다. 1951년 심부름으로 바바가 머물던 하이데라바드에 가게 되었는데, 바바는 그에게 "다시 와서 나와 함께 지내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크리슈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바바에게 돌아와, 데라둔, 마하발레슈와르, 사타라에서 다시 밤샘 경비를 섰다.
1955년 사타라에서 한 학교 교장이 학생 앞으로 온 편지 때문에 크리슈나를 잘못 의심했다. 바바는 그녀에게 크리슈나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음을 알지만 그래도 집으로 보내겠다고 했고, 크리슈나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신이 아무 잘못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내 나름의 이유로 당신을 보내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나자르를 두고 내적으로 도울 것입니다." 그 뒤 크리슈나는 다시는 만달리의 상근 구성원으로 머물지 않았지만, 1955년 사하바스 프로그램처럼 여러 차례 다시 불려 왔다. 1957년 3월 바바는 그에게 급히 전보를 보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나는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을 담아, 바바."
1968년 크리슈나는 예고 없이 메헤라자드를 찾아왔고, 바바는 그를 홀로 만나 아주 오랫동안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육신의 만남이었다. 1969년 1월 31일 바바가 육신을 떠나자, 크리슈나는 자정에 아흐메드나가르에 도착해 메헤라바드까지 몇 마일을 걸어왔고, 바바의 시신을 보고는 정신을 잃었다. 1989년 그는 메헤라바드로 돌아와 지냈지만, 건강이 나빠져 결국 케랄라로 돌아갔고, 2003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딸과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