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로라 데이비, 곧 키티는 1891년 8월 28일 런던 켄싱턴에서 존 데이비와 헬레나 데이비의 딸로 태어났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음악 교사로 일하던 1931년, 동생 허버트가 데번셔 이스트 찰러콤에 있는 메러디스 스타의 수련처 이야기를 편지로 전했고, 그곳에 다녀온 그녀는 메헤르 바바를 알게 되었다. 허버트는 바바가 처음 서양을 찾았을 때 켄싱턴 러셀 로드 32번지의 부모님 집에 머물도록 준비했다. 1931년 9월 12일 키티는 빅토리아역에서 바바를 기다렸고, 그녀의 방이 바바가 쓰도록 마련되었다.
키티는 바바의 초기 영국인 제자들의 중심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932년 베네치아에서 바바는 서양 연인들에게 동양식 이름을 하나씩 주었는데, 키티는 연꽃이라는 뜻의 사로자가 되었다. 찬지는 사로자의 사랑이 "마땅히 그래야 하듯 언제나 사심이 없다"고 썼다. 그녀는 1933년 4월 6일 봄베이에 도착한, 인도로 바바를 찾아간 첫 서양 여성 무리 가운데 하나였고, 그해 여름에는 바바가 이탈리아에 머물 포르토피노의 집을 준비하고 모든 일을 관리했다. 1936년 12월 마가렛 크래스크, 델리아 드레온과 함께 다시 인도로 건너가 나식에 머물며 피아노를 가르치고, 바바가 계획한 영화를 위해 마가렛의 춤에 음악을 붙이는 일을 도왔다.
1937년 11월 말 키티는 메헤라바드에서 동양인 여성 만달리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바바는 그녀에게 부엌일을 맡기고 나자와 코르셰드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했다. 연기 나는 석유 화로 옆에 몇 시간씩 앉아 차파티 굽는 법을 배우던 어느 날, 그녀는 이런 일을 하려고 인도에 온 것이 아니라며 서글퍼했다. 바로 그날 저녁 바바는 마치 그녀에게 하듯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자신의 일이며, 그 뜻대로 일하는 것이 가장 큰 고행이라는 것이었다. 키티는 그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녀는 1938년과 1939년의 블루 버스 여행에 함께했고, 마니와 케이티에게 타자를 가르쳤으며, 전쟁 기간 내내 방갈로르와 메헤라바드 등지에서 여성들과 함께 살았다. 새로운 삶 기간에는 지시에 따라 라노 게일리와 함께 봄베이에서 학교 교사로 일했다.
1952년 미국 방문 중에 바바는 키티와 라노에게 인도로 돌아가지 말고 머틀 비치에 남아 엘리자베스 패터슨을 도울 수 있겠는지 물었다. 키티는 망설임 없이 "네, 물론입니다, 바바"라고 답했고, 엘리자베스가 그녀를 택하자 15년 반 동안 함께한 바바 곁을 떠났다. 그 뒤로 그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머틀 비치의 메헤르 영성 센터에서 살며 일했고, 1956년과 1958년 바바가 센터를 찾았을 때 그를 맞이했다. 1962년에는 푸나 구루프라사드에서 열린 동서 집회에 참석했다.
키티는 바바를 따른 50년을 담은 책 『사랑만이 이긴다: 메헤르 바바와 함께한 삶 이야기』(1981)를 썼고, 센터의 사로자 도서관은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녀는 1991년 12월 3일 100세의 나이로 머틀 비치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상부 메헤라바드의 메헤르 바바 사마디 가까이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