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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마마

칼레마마

Kalemama

람찬드라 바푸지 칼레 (R.B. 칼레)

메헤라바드 건설과 기계 일을 맡은 토목 기사

1877년 2월 12일 ~ 1954년 8월 16일
인도 콜라푸르 → 인도 메헤라바드 아쉬람

전기

람찬드라 바푸지 칼레는 칼레마마라는 애칭으로 불린 메헤르 바바의 가장 초기 만달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6년에 바바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평생 네 분의 완전한 스승(쉬르디의 사이 바바, 사코리의 우파스니 마하라지, 케드가온의 나라얀 마하라지, 그리고 메헤르 바바)을 만나는 드문 영예를 누렸다.

1877년 2월 12일 콜라푸르에서 태어난 칼레마마는 왕실과 연이 닿는 유력한 브라만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콜라푸르 마하라자의 개인 집무실에서 수석 서기로 일했다. 유복한 환경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은 그는 1903년 푸나 과학 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영국 통치 시기에 이 자격은 앞길이 보장된 경력을 뜻했고, 칼레마마는 콜라푸르 시 자치체 최고 행정 책임자, 발라르샤 영지 기사, 둘레 시 자치체 수석 책임자, 악칼코트 번왕국 주 기사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칼레마마의 영적 여정은 메헤르 바바를 만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908~1909년 부르한푸르에서 공사를 감독하던 그는 기차역에서 나라얀 마하라지의 다르샨을 받았다. 1910년 12월 겨울 휴가 때 그는 친구들과 쉬르디를 찾아 처음으로 사이 바바의 다르샨을 받았다. 1911년 초에는 형 안나와 바테 씨 딸의 혼담에 사이 바바의 승낙을 받으려고 형과 함께 다시 쉬르디를 찾았다. 이때 사이 바바는 칼레마마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너는 우리 사람이다.' 이 말의 뜻은 훗날에야 분명해졌다.

1926년 5월, 둘리아 시 자치체의 수석 책임자로 일하던 칼레마마는 메헤라바드의 교사 고마 가네시가 쓴 마라티어 소책자 『사트 사마감(진리와의 대면)』을 접했다. 한 친척이 그를 메헤라바드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그는 메헤르 바바의 첫 다르샨을 받았다. 이 '우연한' 만남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바바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열망을 느꼈다.

1929년 11월 30일, 칼레마마는 아내 잔키, 형 안나 사헵 칼레와 함께 나식에 왔다. 세 사람 모두 만달리의 상주 일원이 될 운명임을 알았던 바바는 직접 그들을 돌보며 숙소를 가장 좋게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1933년 무렵 칼레마마는 가족과 함께 메헤라바드의 가족 숙소로 옮겨 와 살았다.

칼레마마의 공학 지식은 바바의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메헤라바드와 훗날 방갈로르에서 여러 공사를 감독하며 바바의 아쉬람 시설을 세우는 데 전문 기술을 보탰다. 1949년 6월 21일, 대은둔을 하루 앞두고 칼레마마는 바바를 위해 바가바드 기타를 낭독하는 영예를 얻었다.

1934년 3월, 잔키가 심장 질환으로 위중해졌다. 3월 13일 바바가 찾아오자 그녀는 너무 기뻐서 아픔도 잊었다. 바바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내일이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날 밤 새벽 3시 30분(3월 14일), 그녀는 갓맨(God-Man, 사람이 된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자유로워졌다. 바바는 사랑과 감사의 표시로 그녀의 이름을 '사랑하는 고인 120명' 명단에 넣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칼레마마는 남성 만달리 숙소로 옮겨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939년, 판치가니의 딸 집에 머물던 칼레마마는 완전한 스승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회고록을 썼다. 이 회고록은 귀중한 역사 기록이다. 1941년 12월 사드구루 우파스니 마하라지가 육체를 떠나자, 바바는 그를 사코리로 보내 장례에 참석하게 했다.

1954년 6월 29일, 아흐메드나가르를 찾은 바바는 칼레마마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마치 그를 보려고 일부러 먼 길을 온 것 같았다. 78세였지만 건강해 보였던 칼레마마는 두 달 뒤인 1954년 8월 16일 메헤라바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온화한 성품, 여러 완전한 스승과 맺은 남다른 인연, 수십 년에 걸친 봉사로 그는 만달리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일원이 되었다. 아들 무를리는 새로운 삶의 동반자로 바바와 집안의 인연을 이어 갔고, 그 고된 여정 속에서도 모범적이고 쾌활한 태도를 보여 바바에게 칭찬받았다.

사진 갤러리(11 장)

생애 연표

1877

2월 12일 콜라푸르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남

1903

푸나 과학 대학 토목공학과 졸업

1908-1909

부르한푸르 기차역에서 나라얀 마하라지 만남

1910-1911

1910년 12월 쉬르디에서 사이 바바를 처음 만남. 1911년 초 두 번째 방문 때 '너는 우리 사람이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들음

1917

케드가온-벳 사원에서 나라얀 마하라지를 다시 만남

1926

5월, 메헤라바드에서 메헤르 바바와 첫 만남

1927

사코리에서 우파스니 마하라지 만남

1929

11월 30일, 아내 잔키, 형 안나 사헵과 함께 나식에 옴

1933

가족과 함께 메헤라바드 가족 숙소로 옮겨 와 정착

1934

3월 14일 아내 잔키가 세상을 떠남. 남성 만달리 숙소로 옮김

1939

완전한 스승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회고록 작성

1941

바바의 지시로 사코리에 가서 우파스니 마하라지의 장례에 참석

1949

6월 21일, 대은둔을 하루 앞두고 바바를 위해 바가바드 기타를 낭독

1954

8월 16일 메헤라바드에서 세상을 떠남(『로드 메허』 3548쪽)

말씀

“

칼레마마는 "불안한 안식"의 화신입니다. … 그처럼 가만있지 못하는 사람이 나를 백 퍼센트 신뢰하고 여러 해 동안 내 곁에 붙어 있는 것은, 나로서는 할 수 없었을 요가입니다.

(1945년 5월 메헤라바드. 모인 만달리 앞에서 가까운 이들을 한 사람씩 이야기하던 바바는, 구스타지가 손을 빙글빙글 돌리는 시늉으로 칼레마마를 가리킨다고 덧붙였다.)

“

나는 칼레마마 안에도 있고 마사지 안에도 있습니다. 마사지는 여든 살인데도 치아가 모두 온전합니다. 칼레는 예순인데 치아가 몇 개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마사지는 여든에 치아가 모두 있다고 기뻐해야 하고, 칼레는 예순도 되기 전에 치아를 많이 잃었다고 걱정해야 하겠습니까? 환영 속에서는 어떤 것도 실속이나 실체가 없습니다. 치아가 있는 사람도, 치아가 없는 사람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1935년 4월 15일 나식. 가족 문제로 불안해하던 나발 탈라티를 찾아간 바바는, 건강과 병,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이 모두 환영이라는 예로 칼레마마와 마사지를 들었다.)

주요 이야기

사이 바바의 수수께끼 같은 말

1911년 형 안나와 함께 쉬르디를 찾은 칼레마마는 가진 돈 2루피를 모두 사이 바바에게 바쳤다. 사이 바바가 4루피를 더 달라고 했지만, 칼레마마에게는 돈이 없고 여행 가방 열쇠뿐이었다. 그는 형에게 돈을 가져오라고 보내면서 그 열쇠를 건넸다. 기다리는 동안 사이 바바가 마라티어로 말했다. '너는 우리 사람이다. 언제 다시 올 거지?' 칼레마마가 대답했다. '당신께서 다시 불러 주실 때면 언제든지요.' 이 말의 뜻은 훗날에야 분명해졌다.

아내의 해방

1934년 3월 13일, 잔키가 심장 질환으로 위중했을 때 바바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바바를 보고 너무 기뻐서 아픔도 잊었다. 바바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내일이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날 밤 새벽 3시 30분, 그녀는 숨을 거두며 갓맨(God-Man, 사람이 된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자유로워졌다. 바바는 훗날 그녀의 이름을 '사랑하는 고인 120명' 명단에 넣었다.

바바를 위한 바가바드 기타 낭독

1949년 6월 21일, 바바의 대은둔을 하루 앞두고 칼레마마는 바바를 위해 바가바드 기타를 낭독하는 영예를 얻었다. 여러 완전한 스승을 만난 사람에게 어울리는 신성한 임무였다.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