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찬드라 바푸지 칼레는 칼레마마라는 애칭으로 불린 메헤르 바바의 가장 초기 만달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6년에 바바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평생 네 분의 완전한 스승(쉬르디의 사이 바바, 사코리의 우파스니 마하라지, 케드가온의 나라얀 마하라지, 그리고 메헤르 바바)을 만나는 드문 영예를 누렸다.
1877년 2월 12일 콜라푸르에서 태어난 칼레마마는 왕실과 연이 닿는 유력한 브라만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콜라푸르 마하라자의 개인 집무실에서 수석 서기로 일했다. 유복한 환경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은 그는 1903년 푸나 과학 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영국 통치 시기에 이 자격은 앞길이 보장된 경력을 뜻했고, 칼레마마는 콜라푸르 시 자치체 최고 행정 책임자, 발라르샤 영지 기사, 둘레 시 자치체 수석 책임자, 악칼코트 번왕국 주 기사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칼레마마의 영적 여정은 메헤르 바바를 만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1908~1909년 부르한푸르에서 공사를 감독하던 그는 기차역에서 나라얀 마하라지의 다르샨을 받았다. 1910년 12월 겨울 휴가 때 그는 친구들과 쉬르디를 찾아 처음으로 사이 바바의 다르샨을 받았다. 1911년 초에는 형 안나와 바테 씨 딸의 혼담에 사이 바바의 승낙을 받으려고 형과 함께 다시 쉬르디를 찾았다. 이때 사이 바바는 칼레마마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너는 우리 사람이다.' 이 말의 뜻은 훗날에야 분명해졌다.
1926년 5월, 둘리아 시 자치체의 수석 책임자로 일하던 칼레마마는 메헤라바드의 교사 고마 가네시가 쓴 마라티어 소책자 『사트 사마감(진리와의 대면)』을 접했다. 한 친척이 그를 메헤라바드로 초대했고, 그곳에서 그는 메헤르 바바의 첫 다르샨을 받았다. 이 '우연한' 만남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바바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열망을 느꼈다.
1929년 11월 30일, 칼레마마는 아내 잔키, 형 안나 사헵 칼레와 함께 나식에 왔다. 세 사람 모두 만달리의 상주 일원이 될 운명임을 알았던 바바는 직접 그들을 돌보며 숙소를 가장 좋게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1933년 무렵 칼레마마는 가족과 함께 메헤라바드의 가족 숙소로 옮겨 와 살았다.
칼레마마의 공학 지식은 바바의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메헤라바드와 훗날 방갈로르에서 여러 공사를 감독하며 바바의 아쉬람 시설을 세우는 데 전문 기술을 보탰다. 1949년 6월 21일, 대은둔을 하루 앞두고 칼레마마는 바바를 위해 바가바드 기타를 낭독하는 영예를 얻었다.
1934년 3월, 잔키가 심장 질환으로 위중해졌다. 3월 13일 바바가 찾아오자 그녀는 너무 기뻐서 아픔도 잊었다. 바바는 그녀를 안심시켰다. '내일이면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날 밤 새벽 3시 30분(3월 14일), 그녀는 갓맨(God-Man, 사람이 된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자유로워졌다. 바바는 사랑과 감사의 표시로 그녀의 이름을 '사랑하는 고인 120명' 명단에 넣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칼레마마는 남성 만달리 숙소로 옮겨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1939년, 판치가니의 딸 집에 머물던 칼레마마는 완전한 스승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회고록을 썼다. 이 회고록은 귀중한 역사 기록이다. 1941년 12월 사드구루 우파스니 마하라지가 육체를 떠나자, 바바는 그를 사코리로 보내 장례에 참석하게 했다.
1954년 6월 29일, 아흐메드나가르를 찾은 바바는 칼레마마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마치 그를 보려고 일부러 먼 길을 온 것 같았다. 78세였지만 건강해 보였던 칼레마마는 두 달 뒤인 1954년 8월 16일 메헤라바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온화한 성품, 여러 완전한 스승과 맺은 남다른 인연, 수십 년에 걸친 봉사로 그는 만달리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일원이 되었다. 아들 무를리는 새로운 삶의 동반자로 바바와 집안의 인연을 이어 갔고, 그 고된 여정 속에서도 모범적이고 쾌활한 태도를 보여 바바에게 칭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