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셰리아르 이라니는 1902년 9월 15일 푸나에서 태어난 메헤르 바바의 살아남은 세 남동생 가운데 맏이로, 아바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바로 그 집에서 자랐다. 훗날 사람의 몸을 입은 하나님으로 알려질 형을 둔 동생으로서, 잘의 삶에는 남다른 영적 시험이 놓여 있었다. 자기 형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처음에 잘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열일곱 살의 잘은 형의 말을 비웃으며 하나님이라면 증명해 보라고 따졌다. 메르완은 답했다. '당신 손바닥에 불붙은 숯을 올려놓겠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메르완의 신호에 따라 베일리가 집에서 쓰던 조로아스터교 기도용 불 단지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숯을 꺼내 잘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잘은 살갗이 타들어 가는 것을 놀라서 지켜보았지만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잘은 훗날 그 뒤 정신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회상했다. 놀랍게도 회복하는 동안 바바가 찾아올 때마다 잘은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또 한번 그를 바꾸어 놓은 일은 바바가 잘에게 나병 환자 몇 명을 데려오라고, 그들을 목욕시키겠다고 했을 때 일어났다. 나병이 쉽게 옮는다고 믿었던 잘은 머뭇거렸다. 바바는 특유의 단호함으로 밀어붙였다. '나에게 순종하든지, 아니면 나를 떠나십시오!' 잘이 따르겠다고 하자 바바는 그가 나병 환자들 속에서 자기를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형이 나병 환자들을 씻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잘의 눈앞에서 그들의 모습이 바뀌었다. 나병 환자들이 바바가 된 것이다. 이런 경험들로 잘의 의심은 녹아내렸고 믿음은 굳건해졌다.
잘은 오랫동안 바바의 어린 시절 집인 푸나의 다스투르 메헤르 로드 750번지에 살며 '푸나의 안내인'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 내내 그는 흰 옷에 검은 '파르시 모자'를 쓰고 검은 우산을 든 특유의 차림으로 푸나를 찾는 순례자들을 맞았다. 온화하고 선량한 성품에 끝없이 이어지는 농담과 이야기가 더해져, 그와 함께한 시간은 순례자들에게 늘 즐겁고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다.
잘은 순례자들을 바바와 관련된 중요한 장소들로 데려갔다. 바바가 어린 시절을 보낸 두 집, 바바잔의 사마디, 바바가 명상하던 동굴, 그리고 바바의 이름을 들으면 소리 높여 울던 코끼리 수미트라가 있는 동물원이었다. 이 순례 길에는 이야기와 농담, 때로는 마술까지 곁들인 가르침의 순간들이 이어졌다.
그의 가르침은 독특하면서도 효과가 있었다. 찻집에서 그는 순례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곤 했다. 상대가 '나는 하나님입니다'라고 답하면 잘은 얼굴을 찌푸리며 바로잡았다. '아니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성자라고도 말하지 마세요!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하지 마세요! 그냥 바바, 바바는 하나님이다, 이렇게만 말하세요! 그게 전부입니다!' 의견이 맞지 않아 찾아온 부부에게는 '노래로 말하세요'라고만 했는데, 이 말 자체를 부드러운 가락에 실어 읊조렸다. 부부는 그의 재치 있는 조언을 따랐고, 그날 하루 내내 사이좋게 지냈다.
붐비는 푸나의 큰길을 걷다가 한 순례자가 '이 사람들은 다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잘은 진지하게 짧게 답했다. '그들은 환영입니다.' 그가 즐겨 되풀이하던 농담에는 지혜가 숨어 있곤 했다. 일찍 도착한 줄 알았더니 사실은 '어제 기차'였다는 기관사 이야기가 그 예다.
1932년 잘은 먼저 중국으로 보내진 만달리 가운데 한 명이었고, 6월에 상하이에 도착한 바바를 맞았다. 그는 사도 서간과 같은 마음으로 순례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그들을 '사랑하는 형제'라고 불렀고, 그들의 눈에서 '바바의 사랑이 빛나는 것'이 보인다고 일깨워 주었다.
잘 셰리아르 이라니는 1982년 2월 21일 세상을 떠나 푸나의 파르시 침묵의 탑에 안치되었다. 그는 자기 형에게서 신성을 보는 법을 배운 동생으로, 그리고 생애 마지막 수십 년을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푸나에서 메헤르 바바의 자취와 만나도록 도우며 보낸 사람으로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