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울랏 소랍 이라니, 곧 다울랏마이는 메헤르 바바의 으뜸 여성 제자 메헤라 J. 이라니의 어머니다. 소랍 살라마트 이라니와 쉬린의 딸이며, 프레이니 노우로즈 드라이버(파드리의 어머니 프레이니 마시)의 동생이다. 남동생 메르완 소랍 이라니 대령은 인도 의무대의 군의관이었다. 1902년 그녀는 정부 산림 관리관으로 인도 곳곳을 다니던 제항기르 호르무스지 이라니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프레이니(피로자), 메헤라, 그리고 어려서 세상을 떠난 아들 케르사습이 있었다. 제항기르가 중년에 세상을 떠난 뒤 다울랏마이는 두 딸과 함께 푸나에 자리 잡았다.
1921년 프레이니 마시는 동생을 먼저 하즈랏 바바잔에게, 그리고 푸나 카스바 페트의 사다시브 집에 있던 메헤르 바바에게 데려갔다. 바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묻자, 그녀는 딸 피로자가 아프고 식욕을 잃었다고 말했다. 바바는 조로아스터의 성화가 타오르는 우드와다로 피로자를 데려가라고 했고, 그대로 따르자 딸이 나았다. 첫 만남부터 두 자매는 바바에게 큰 사랑과 믿음을 품었다. 1923년 그녀는 바바의 요청에 따라 피로자(프레이니)를 굴마이의 아들 루스톰과 혼인시키기로 했고, 이 일로 바바와 더욱 가까워져 사랑으로 모든 것을 그에게 내맡겼다.
1924년 5월 다울랏마이는 메헤라와 함께 메헤라바드에 왔고, 곧 최초의 여성 만달리와 함께 우체국 건물에서 살게 되었다. 이 건물은 1925년 여성 만달리의 상설 거처가 되었다. 다울랏마이는 그곳에서 요리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바바의 일에 큰돈을 내놓았고, 바이둘이 페르시아에서 바바의 이름으로 운영한 학교의 경비를 댔으며, 1927년에는 재산을 바바에게 기부하려고 푸나에 갔다. 누나와 메헤라가 자기와 함께 살기를 바랐던 동생 대령은 바바를 격렬히 반대하여 여러 해 동안 구자라티어 신문에 비방 기사를 실었지만, 다울랏마이는 떠나기를 거부하고 바바의 발치에 머물렀다.
1920년대 후반부터 다울랏마이는 주로 나식에서 여성 만달리 가까이나 딸 프레이니의 집에서 지냈고, 때로는 메헤라바드 근처의 가족 숙소에 머물렀다. 바바의 지시로 침묵을 지켰으며, 1933년부터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 1938년 바바는 그것이 "그녀에게 영적으로 유익할 것"이라며 그녀를 페르시아에 1년쯤 보냈다.
다울랏마이는 1952년 11월 5일 오전 4시 나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메헤라바드에서 소식을 들은 바바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소중한 다울랏마이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영원히 내 안에 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 나는 헌신자의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별세를 알리는 회람이 바바의 가까운 여성 제자들에게 보내졌고, 뒤에 메헤라바드 언덕에 그녀의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에는 "바바를 가장 사랑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 20년간 침묵을 지킴."이라고 새겨져 있다. 『로드 메허』와 메헤르 바바 트래블스의 그녀 항목은 1921년에 45세, 별세 때 76세(1876년경 출생)로 적고 있으나, 묘비와 메헤르 바바 트래블스의 가계도는 출생 연도를 1883년으로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