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간 시타람 다타트레이 데쉬무크는 교사 역할로 인해 '차간 마스터'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바바를 가장 오래 섬긴 만달리 일원 중 하나였다.
차간은 1925년 열아홉 살 때 메헤라바드의 메헤르 바바에게 왔으며, 빠르게 만달리의 핵심이 되었다. 1927년 바바는 다른 만달리에게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차간은 매우 다정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나를 기쁘게 했고, 그래서 나는 그를 밀어 주고 싶어졌습니다."
차간은 메헤라바드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인도 전역을 여행하는 동안 바바와 만달리의 식사를 준비하는 요리사로 배정되었다. 또한 메헤라바드 아쉬람의 소년들을 위한 교사로 임명되어 '차간 마스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요리와 교육에서부터 개인 시중, 바바의 침구 준비, 인도 전역의 긴 여행에 스승을 수행하는 일까지 다양한 임무를 맡았다.
1927년, 차간의 깊은 사랑과 감정적 성격이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아콜네르에서 바바에 대한 모욕이 가해진 어려운 사건 이후, 차간은 극도로 우울해져 옷을 벗어 경찰에게 넘기고 허리두르개(랑고티)만 걸친 채 목숨을 끊으려고 들판으로 나갔다. 그는 나중에 저수지 근처에서 자신을 멈추게 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메헤라바드로 돌아왔을 때 바바는 그를 용서하고 두니에서 가져온 신성한 재를 이마에 발라 축복했다.
차간의 아내 샨타는 그의 영적 길을 지지했다. 차간이 바바에 대한 봉사 결의를 말했을 때, 그녀는 소박하게 살며 가정생활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1940년대 후반 새로운 삶(New Life) 단계에서 차간은 바바의 부름에 '예'라고 썼지만, 아내가 울기 시작하자 바바는 그를 의무에서 풀어주면서 구걸로 얻은 음식을 먹으라고 명했다.
1967~68년 바바는 차간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우타르 프라데시의 하미르푸르, 바그다, 칸다르카 등지에서 열린 '메헤르 멜라'(축제)에 보냈다. 매번 떠나기 전에 바바는 그를 메헤라자드로 불러 바우가 써 준 힌디어 연설문을 읽게 했다. 1954년 9월, 차간은 메헤르 바바 뒤에 서 있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고, 1960년대에는 가족이 푸나의 구루프라사드에서 바바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차간은 평생 바바에 대한 헌신을 유지하며 40년 이상 봉사했다. 1972년 2월 1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전인 1971년에 구술 역사 아카이브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어윈 럭에게 인터뷰를 주었으며, 메헤르 바바와 함께한 삶의 직접적인 기억을 보존했다. 메헤르 바바 트래블스는 출생을 1908년 12월로 적지만, 『로드 메허』는 1925년 바바에게 왔을 때 그를 열아홉 살로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