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바바는 베흐람지와 보만지에게 화난 듯한 일을 계기로, 만달리 사이 카스트 편견을 뿌리 뽑는 작업에 마지막 손질을 가했다.
바바의 이 명령은 힌두 만달리에게 큰 충격이었고, 오후에 새 지시를 검토하는 회의가 열렸다. 힌두들은 낮은 카스트 사람이 배식하는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모두 바바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키산 마스터만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나, 저녁 식사 때가 되자 그도 바바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바바는 저녁 8시 30분에 언덕 위로 돌아갔다.
마침내 힌두 만달리에게 자각과 이해가 찾아왔다. 놀이를 하고, 바닥을 쓸고, 영화를 보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등 스승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는 일이 가장 높은 종교 의식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스승의 명에 따른 행위 외의 모든 행위가 자신의 산스카라적 속박에서 나온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이제 마하르들이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이 문제는 이전에 특히 민감해 그들의 반대를 불러온 핵심 원인이었다.
낮은 카스트 사람이 브라만과 같은 우물을 쓴다는 것은 당시 인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스승의 이 작업은 외형상 작은 규모였지만, 초기에 메헤라바드에서 수행된 내적 작업의 파장은 인도 전역에 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층 계급 배척을 규탄하는 항의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26년 11월 16일 화요일, 바바는 11시쯤 언덕에서 내려왔다. 그날은 힌두 단식일 에카다시였고, 바바는 힌두 만달리 중 누가 단식할 의향인지 물었다. 카카 샤하네만 나서자 바바는 자신이 모두를 대신해 단식하겠다고 정했다. 바바는 전날 오후 이후 아무 음식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메헤라바드를 떠나는 일정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다. 바바는 11월 25일 봄베이와 로나블라로 가서 12월 4일 돌아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덧붙였다. "사다시브 파틸과 세일러에게서 푸나 차투르슈링기 근처에서 만달리와 함께 지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일단 메헤라바드를 떠나면 푸나, 봄베이, 로나블라를 거쳐 카라치로 갈 것 같다."1
각주
- 1.차투르슈링기는 바바의 푸나 조프디(움막)가 있었던 지역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