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해리 켄모어는 6월 4일 구루프라사드에 도착했고, 11일 오후에 떠날 때까지 매일 방문이 허락되었다. 해리는 미국에서 바바를 위해 푹신하게 덧댄 리클라이닝 의자를 먼 길로 실어 왔다. 안타깝게도 그 의자는 운송 도중 잘못 처리되어 베이루트에서 내려졌다. 의자는 결국 푸나에 도착했고, 바바는 해리의 세심한 마음씀씀이를 기뻐했다.
해리는 녹음기도 가지고 왔는데, 사타라의 람주를 찾아가 바바와 처음 접촉하던 시절의 기억을 녹음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바는 해리를 그곳으로 보내지 않았다.
켄모어가 머무는 동안인 6월 7일, 해리가 뉴욕에서 바바의 이름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바바는 그에게 매년 뉴욕시에서 공개 기념행사를 두 번 열라고 지시했다. 하나는 바바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였고, 다른 하나는 침묵의 날을 위한 행사였다.
바바는 또 함이르푸르의 케샤브 니감과 푸카르도 불러,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하루 남짓 머문 뒤 바바의 지시를 받고 떠났다.
1966년 6월 5일 일요일 아침, 베헤람의 가족이 제항구와 굴나르의 딸 메헤르나즈의 나브조트 의식을 위해 구루프라사드에 왔다. 아이의 사드라와 쿠스티, 모자와 새 옷이 바바 앞의 강철 쟁반 위에 놓였다. 바바는 그녀에게 사드라와 쿠스티를 건네고, 샤리아트(종교적 전통)의 불필요한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메시지가 적힌 종이 한 장도 함께 주었다. 그 메시지는 6년 전 짐 미스트리의 아들들의 나브조트 의식 때 주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에루치가 그것을 읽어 주었고, 이어 메헤르나즈가 스승의 기도를 암송한 뒤 여자들 쪽으로 가서 메헤라에게 사드라와 쿠스티를 입었다.
서신을 처리하는 일은 구루프라사드의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서신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편지와 전보는 꾸준히 도착했고, 해마다 점점 더 늘어났다. 에루치와 마니는 인도와 서방에서 오는 서신을 영어로 처리했고, 바우는 인도 내 힌디어 서신을 맡았으며, 아디는 안드라에서 오는 서신과 미국 및 유럽의 일부 서신을 담당했다. 알로바는 이란의 러버들에 관한 편지에 페르시아어로 답했다. 펜두는 구루프라사드의 관리자였고, 바우와 라노와 함께 야간 경비도 나누어 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