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좋다. 네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돌아와 내 오두막을 쓰는 일을 잊지 마라!"
나자가 말했다. "저는 당신을 섬기고 싶습니다. 기회만 주세요."
바바가 답했다. "나를 섬기는 일은 가장 어렵다.
나를 계속 기억해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여인이 거듭 청하자 바바가 말했다. "이란에서 딸 혼사를 마친 뒤 내게 오너라. 그러면 나를 섬길 기회를 주겠다."
나자는 그 말에 크게 기뻐했지만, 남편은 그녀의 이란행을 몹시 반대했다. 그녀는 남편의 뜻을 거슬러 이란으로 가서 종교 의식을 치렀고, 딸의 혼사도 적절한 총각과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란에서 돌아온 뒤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의식해 바바를 찾아가지 않았다. 이후 그녀는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우울해졌으며, 그 상태가 여섯 달 동안 이어졌다. 의사들이 갖가지 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때 바바는 봄베이에 있었다. 나자의 딸 프레이니는 어머니가 "그의 오두막을 쓸겠다"고 약속한 일을 떠올리며, 어머니를 바바에게 데려가고 싶어 했다. 어머니도 그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친척들이 막았다. 안타깝게도 가족의 반대를 이겨 내지 못했기 때문인지, 혹은 바바의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인지, 그녀의 정신적 불안은 이후 수년간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다.
1922년 5월, 바바는 사코리에서 우파스니 마하라지의 52번째 생일을 성대하게 치르도록 준비했다. 그는 만달리에게 말했다. "9일에 나와 함께 사코리로 갈 준비를 모두 해라.
그곳에서 마하라지 생일을 축하한 뒤, 우리는 걸어서 봄베이까지 행군할 것이다."
만달리는 이미 봄베이 도보 여정과 그곳에서 1년 머무는 계획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바바는 각 사람이 합류하기 전에 세속적 책임을 모두 정리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인도 전역의 정치적 불안과 소요가 심했기 때문에, 바바는 자신들의 무리가 무정부주의 집단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동행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고 체포·수감 가능성까지 있다고 경고했다.1
많은 남자들이 바바와 함께 가겠다고 했고, 마스터가 말린 이들조차 그의 곁에 서겠다는 결심을 꺾지 않았다.
각주
- 1.마하트마 간디는 1921년의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6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영국 당국은 혁명가로 의심되는 사람을 체포하여 무정부 상태를 막으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