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프랑켄베르크는 시인이자 예술가인 프랜시스를 라비아 마틴의 인도행에 동행시키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보냈지만, 앞서 말했듯 라비아의 병으로 그 여행은 취소되었다.
1년 뒤인 1948년, 프랜시스는 자신이 꾼 생생한 꿈들에 대해 바바에게 편지를 썼다.
바바는 가니 박사를 통해 이렇게 답했다. "바바는 당신이 그를 친구로 여겨 주기를 매우 바란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그를 사랑하는 님으로 보게 될 것이다."
실로 이 향기로운 꽃이 마음속 사랑하는 님께 귀의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53세의 아이비 듀스는 라비아가 자신을 수피 교단의 다음 무르시다로 지명하자 놀랐다. 그녀는 자신에게 참된 무르시다로 활동하는 데 필요한 영적 깨달음이 없다고 느꼈다. 또한 수피 교단을 이끄는 세속적 책임을 떠맡을 만한 능력도 자격도 자신에게 없다고 느꼈다. 라비아가 죽은 뒤 혼란에 빠진 아이비의 머릿속에는 바바를 만나러 인도로 가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라비아 마틴의 본래 구상을 실행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미국 수피즘의 미래를 메헤르 바바의 발 앞에 바치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반드시 해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아이비는 바바와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고, 수피 교단을 위해 참되고 깨우친 스승, "어쩌면 동양에서 온 누군가"를 임명해 달라고 청할 생각이었다. 그 사람이라면 미국에 와서 교단을 안정된 기반 위에 세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바바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었다.
바바는 그녀가 인도에 와서 자신을 만나는 것을 허락했고, 1948년 1월 7일 수요일 아이비와 열여덟 살 된 딸 차르미안은 핌팔가온에 도착했다. 메헤르지는 그들을 오후 3시에 봄베이에서 자기 차로 데려왔다. 아이비는 메헤르지가 사업차 미국에 왔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바는 평소 밤이면 쉬곤 하던 라탄샤 갸라의 오두막에서 그들을 만났다. 가니가 알파벳 판을 읽고 있었다. 돈과 메헤르지, 아디 시니어도 그 면담에 함께 있었다. 바바를 보는 순간 아이비는 울음을 터뜨렸고, 그 첫 만남은 사랑하는 님의 발 앞에서 평생 바치는 귀의와 봉사로 이어졌다.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나는 그전에는 그런 눈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눈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나는 눈물에 흐려진 시야 너머로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갈색이고 아주 크며, 날카로운 지성과 번뜩임, 풍부한 표현을 지녔다는 사실조차 나는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내가 그분 앞에 앉아 있는 동안, 그 눈에는 나를 매혹하고 애태우는 또 다른 성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