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바바는 마사지와 시두를 바쁘게 했고, 가족 숙소에 살려고 가족과 함께 온 칼레마마도 마찬가지였다. 칼레마마의 형제 안나사헵 칼레도 얼마 뒤 영구히 머물기 위해 왔다. 파드리는 동종요법을 공부해 아랑가온과 주변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라오사헵은 바바에 관한 글을 페르시아어로 쓰는 일에 몰두했고, 찬지는 바바의 서신을 맡아 처리했다. 잘바이는 완벽한 소년을 찾는 임무를 맡아 매일 한두 명씩 바바에게 데려왔지만, 바바는 예외 없이 모두 돌려보냈다. 이때 메헤라바드에는 약 70명이 머물고 있었다.
한동안 바바는 메헤라바드 언덕에서 여성들의 부엌 옆 작은 방에서 잠을 잤다. 나중에는 1927년에 은둔했던 곳인 지하 묘실에서 자기 시작했다.1 바바는 보통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 또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아래 메헤라바드로 내려와 만달리를 감독하고 서신 및 다른 일들을 처리했다. 루스톰과 아디 시니어는 람주와 함께 나식에 머물렀지만, 여러 문제로 바바를 뵈러 가끔 메헤라바드에 왔다.
이때 메헤라바드의 여성 만달리는 메헤라, 마니, 나자, 순나마시, 작은 코르셰드, 왈루, 카쿠바이(비슈누의 어머니)였다. 필라마이와 그녀의 딸 실라는 오갔다. 순나마시와 카쿠바이는 문가를 지켰고, 나자는 요리를 했으며, 메헤라는 바바의 음식과 의복 및 기타 개인적인 필요를 돌봤다.
아디 시니어는 1933년 12월 3일 일요일 필라마이, 굴마이, 돌리와 함께 도착했다. 굴마이는 바바와 다른 여성들과 함께 언덕에 머물렀고, 돌리는 바바의 좁디에 머물도록 배정되었다. 그날 밤 아디가 그녀를 돌봤고, 그다음 돌리는 언덕의 다른 여성들과 합류했다.
이 기간에 큰 코르셰드(바바의 작고한 형 잠쉐드의 아내)는 아쉬람을 떠나 봄베이로 옮겼는데, 아쉬람 여성 만달리의 엄격한 은둔 생활보다 더 독립적인 삶을 원했기 때문이다. 큰 코르셰드는 잠쉐드가 죽은 뒤인 1926년에 아쉬람에 들어왔고, 1928년 토카에 머물던 여성들 가운데에도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재혼해 결국 카라치로 이주했지만, 바바의 가족과는 연락을 계속했다.
6일 저녁, 나오로지 다다찬지가 봄베이에서 도착했다. 건축 계약자였던 나오로지는 메헤라바드의 더 큰 콜로니 개발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불려왔다.
각주
- 1.이 묘실은 현재 메헤르 바바의 성묘(聖墓)가 위치한 곳이다.
